대한민국 독립유공자는 17,664명 입니다. 하지만 독립 유공자 중에서도 정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게 되는데, 최고등급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입니다. 그런데 이 훈장을 서훈 받은 사람중에 외국인이 있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그것이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외국인으로서 최고 등급의 훈장을 받은 장제스
사실 건국훈장은 국적에 상관 없이 독립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에 외국인이라고 서훈을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중국 국민당의 총수이자 대만 건국의 아버지로 유명한 장제스 역시 독립 유공자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것입니다.
장제스 같은 경우는 나중에 공이 인정되며 받은 것도 아니고,대한민국 건국 초기라고 볼 수 있는 1953년 경에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만큼이나 명확히 우리 나라의 독립에 도움이 된 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최고 등급의 독립 유공 훈장을 받은 이유를 말하자면, 임시정부 설립과 광복군 창군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 가장 큽니다. 임시 정부에서 광복군을 창군 할때 창군 선언문을 작성했는데 그것을 확인해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선언한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말을 해석하면 장제스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에 광복군이 중국에서 원횔히 활동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외국인이 훈장을 받아도 혜택을 받을까?
그렇다면 궁금한 것이 일반적으로 서훈을 받게 되면 본인 혹은 그 직계가족 후손에게 국가 차원의 예우하게 되는데, 외국인이더라도 동일하게 적용되는지 일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의 차이가 있는데, 아무래도 금전적인 이유가 가장 큽니다. 독립 유공자는 기본적으로 나라로부터 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데, 외국인 유공자에 대해서는 지원이 제외 됩니다.
하지만 1953년에 서훈을 받은 장제스는 포상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서훈 등급이 구체적으로 나뉘지도 않았습니다. 서훈 등급을 나누고, 그에 맞춰서 포상을 주게 된 것은 1962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만들어져 지금까지 내려 오고 있는 훈장의 등급은 1등급이 대한민국장, 2등급이 대통령장, 3등급이 독립장, 4등급이 애국장, 5등급이 애족장까지 총 다섯 개의 등급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1962년도에 208명이 서훈을 받게 됩니다. 김구 선생님, 안창호, 안중근 등 총 18명이 1등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채호, 신돌석, 이위종, 이상설은 2등급. 유관순, 김마리아, 장지영, 이회영 등 132명은 3등급 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조금 있는데, 애초에 독립 운동에 대해서 등급을 나누는 것이 가능한가와 독립 유공자에 대한 예외 규정입니다. 대표적으로 국시 위배를 할 경우 독립에 대한 공을 세웠더라도 유공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국시 위배란 국가의 정책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제외 항목은 정치적 과오를 저지른 자입니다. 납북돼서 대한민국이 아닌 북한에 있거나, 변절 하거나, 월남하지 않은 자입니다. 대표적으로 김원봉이 있는데, 김원봉은 일제 시대에 김구 보다 높은 현상금이 붙을 정도로 일제에 큰 저항을 한 인물인데도 광복 후 북한으로 넘어갔다는 이유로 독립 유공자에서 완벽히 제외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항목은 독립 유공을 확인할 기록이 없는 경우 입니다.
중국과 대만의 국부가 대한민국 독립 운동 유공자가 된 이유
어쨋든 오늘의 주제는 독립 유공자로 훈장을 받은 5명의 외국인인데, 장제스는 외에 쑨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고 불리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인데, 우리 나라에는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쑨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텐데, 쑨원은 중국과 대만 모두에게 있어서 국부로 받아들여질 만큼 굉장히 특별한 인물입니다. 중국과 대만은 우리나로와 북한처럼 이념의 차이로 민족이 갈라졌는데도, 하나의 인물을 국부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쑨원은 혁명 지도자이자 정치가이면서, 교육자이자 사상가였습니다. 공화제라고 하는 것을 중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구요.
중국과 대만은 기본적으로 삼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데, 여기서 삼민주의는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 입니다. 중국 공화주의의 시작을 알렸었던 시내 혁명 당시에 가장 배경이 됐었던 사상이라서 왕정을 탈피하고 공화제로 나아가게 했던 첫걸음의 사상적 바탕을 만든 사람이 결국 쑨원인 것입니다.
그리고 공산당과 국민당과의 다툼을 멈추고, 일제에 힘을 합쳐 대항한 제1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냈었던 인물도 쑨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만과 중국 모두에서 국부로서 추앙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국에서 유명한 사람이 왜 한국 정부에서 최고 등급 독립 유공자가 됐을까요? 그것은 1921년쯤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맺은 인연 때문입니다. 1919년에 상해임시정부가 만들어질 때,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 국무총무 대리, 외무총장 등을 역임했던 분이 신규식 선생님인데, 신규식 선생님은 쑨원과 만남을 가지고 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승인이 대단한 일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당시에 우리 나라는 일제의 침략과 병합으로 나라가 없어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임시 정부를 만든 것인데, 만든다고 영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되었든 국제 사회에서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쑨원이 승인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승인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중국, 심지어 일본까지 참석해있던 태평양 회의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쑨원에게 요청했고 쑨원이 이를 받아들입니다. 즉 쑨원은 임시 정부와 한국 독립 운동을 알리는 것에 큰 기여를 한 것입니다.
당연히 쑨원이나 장제스가 마음이 착해서 우리 나라나 당시의 임시정부를 도와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중국 역시 같은 시기에 열강의 침탈로 인해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었고, 당시의 조선을 바라봤을때, 자신들과 같이 제국주의 열강과 싸워 나가는 모습에서 공동 전선을 형성할 수 있겠다라고 하는 생각을 했을 확률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서훈을 받은 장제스와 쑨원의 도움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 등 중국인들도 쉽게 하지 못한 일을 중국땅 내에서 해내게 만들었으니 그들의 충분히 서로에게 가치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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